수치감이란 다른 사람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수치감이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비친 부끄러운 자기 모습 때문에 비롯되는 불안한 감정인 것이다. 따라서 남의 시선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수치감은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왠만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감추고 싶은 약점이나 부도덕한 행위가 남의 눈에 드러날 때 수치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런 까닭에 노정(露呈)은 사람들이 수치감을 느끼게 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이다. 노정이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일면이 어떤 계기로 드러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드러나서 부끄러운 일면에는 과거의 실패, 거짓말, 욕심, 사생활 등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드러났을 때 수치감을 느끼는 정도는 개인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부 끄러워야 할 일면이 발각되었을 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시치미를 딱 떼고 도리어 큰 체를 하는 사람도 많다. 반면 스스로가 부끄러워하며 모든 것을 인정하고 거기로부터 비롯되는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시선을 무시하면 수치감도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치감을 느끼는 정도는 개인적인 차이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누구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있느냐에 따라서도 큰 차이가 있다.

수치감을 느끼는 기준으로 누구의 시선을 삼고 있느냐에 따라 수치감을 느끼는 정도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폐쇄적인 집단일수록 자기들 나름대로의 수치감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기준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 기준이란 것이 가끔 황당할 때가 있다.

한 예를 살펴보자. 과거 일본의 여고생 사이에서 루즈 삭스(loose socks)란 패션이 대유행했던 적이 있다. 이것은
무릎까지 올라오는 길이의 양말을 약간 헐렁하게 하여 흘러내리게 해서 신는 차림이다.

이런 차림이 거리에 넘쳐나기 시작하자 기성세대는 대단히 거부감을 느낀다.  무릇 여고생의 차림이란 단정하고 정갈해야 한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던 기성세대의 눈에 이 패션이 좋아 보일 리는 없었던 것이다.

참 고로 기성세대는 양말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 속터치(sock touch; ソックタッチ)라는 일종의 풀을 사용했다. 그 정도로 양말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싫어했던 것이다. 물론 루즈 삭스 차림에서도 속터치는 사용된다. 양말이 무한정 흘러내리면 곤란하기 때문에 적당히 흘러내린 선에서 접착제로 고정시켜 놓아야 하는 것이다.

당시 길을 가다가 루즈 삭스 차림의 여고생들을 보면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혀를 차는 중고년 여성들, 특히 할머니들이 적지 않았다. 할머니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러한 차림의 여고생은 한마디로 여성으로서의 기본적인 수치심조차 느끼지도 못하는 철딱서니 없는 것들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수치감의 기준은 있기 마련

하 지만 여고생들은 기성세대의 따가운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루즈 삭스는 여고생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나가게 된다. 물론 루즈 삭스를 신던 여학생들이 수치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수치감을 느끼긴 했다. 여고생 때, 루즈 삭스 차림으로 일관했다던 한 여대생의 말을 살펴보자.

“여 름에는 너무나 덥기 때문에 루즈 삭스를 신는 것을 아주 싫어했어요. 하지만 주위 애들이 모조리 그런 차림이다 보니 저 혼자서 평범한 스타킹을 신을 수는 없었습니다. 할머니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우리들 사이에서는 루즈 삭스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창피했던 것입니다.”

물 론 이런 식의 수치감은 루즈 삭스가 유행이 시작될 무렵의 여학생들이 느꼈을 뿐이다. 유행이 퍼져가면서 개나 소나 다 루즈 삭스 차림을 하게 되었을 때 이런 수치감을 느끼는 여학생은 거의 없었다. 이때쯤 되면 수치감을 느끼기는커녕 루즈 삭스 차림을 하는 것을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한 멤버로 이루어지는 폐쇄적인 집단은 자기들 식의 황당한 수치감의 기준을 세워놓고, 집단에 포함되지 않는 일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때가 종종 있다. 이러한 집단의 대표적인 것이 정치인과 종교인이다.

우리 사회의 수치감의 기준은 MB일 수밖에 없다

MB 의 당선으로 우리사회에서 수치감을 느끼게 되는 시선은 대단히 낮아졌다. 성공만 한다면 지난날의 부정과 부도덕한 행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대선결과는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도덕한 행위나 부정을 하더라도 성공만 하면 된다는 삐뚜러진 인생관을 사람들에게 심어줄 수밖에 없다. 바람을 피던 도둑질을 하던  돈이나 잘 벌어다 주는 남편이 장땡인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앞 으로 부정을 저지르는 넘, 혹은 부정이 발각되는 넘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기준은 MB가 될 것이다. 결국 MB보다 더 심한 부도덕한 행위를 한 넘들이 아니고서는 수치심을 아예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들은 앞으로 “대통령도 그랬는데, 내가 뭐 어째서”라는 말을 수없이 듣게 될 지도 모른다. 사실 이러한 징조들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러다보면 몇 년 후 우리들은 루즈 삭스를 신었던 여학생들의 고백과 같은 변명을 지겹도록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 리도 사람인데 거짓말을 하거나 부패한 것은 싫었습니다. 하지만 주위 넘들이 다 부패하고 다 위장하는데 저 혼자 깨끗할 수는 없었습니다. 국민들은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셨지만 우리들 사이에서는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오히려 더 창피했던 것입니다.”.

이런 소리가 우리 사회에 넘쳐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BBK특검은 제대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특검결과가 어찌 되었던 MB의 진솔한 사과가 뒤따라야함은 물론이다

출처 : http://umentia.com/16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