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

나는 글을 읽는 지금 순간부터 행복하다.

나와 나의 가족뿐만 아니라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할 있도록 노력한다.

어차피 인생은 마라톤이다. 지금 조금 앞서 간다고 앞으로도 계속 앞서라는 보장은 없으며, 지금 조금 뒤쳐진다고 앞으로도 계속 뒤쳐지라는 법도 없다.

42.195Km 완주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과정과 결과에 만족하면 족하다.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나은 삶이 있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며, 나머지 사명들은 행복과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 것이다.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 것이며, 항상 새로운 꿈을 만들어 간다.

"영원히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 제임스 딘의 말처럼 이루기 힘든 원대한 꿈을 가진다.

작은 하나부터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실천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항상 노력한다.

  1. 세계를 무대로 Business 한다(무엇을 할지 아직 모름, 이르면 43살에 시작)
  2. 아내와 1년간 세계여행(아마도 60살쯤)
  3. 아이들이 크기 전에 전국일주(자전거/도보) 또는 주일 여행, 많이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다.

  • 열정과 에너지

나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항상 열정과 에너지를 가진다.

자신감 있는 말과 태도로 자신과 다름 사람들을 대하고, 안정이란 이름아래 생명력을 포기하도록 하는 세력 앞에서 굴하지 않는다.

"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다"

"불가능, 그것은 도전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Impossible is nothing"

  1. 세울 것이 없어도 기죽지 않고 자신감 있는 말과 행동으로 생활한다.
  2. 글씨는 흘려쓰지 않고 천천히 정확하게 쓴다.
  3. 안정과 도전이 동일한 무게로 다가올때 도전을 선택한다.

  •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은 꿈을 이루는 지름길이다.


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말을 낳고, 긍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행동을 낳는다.

긍정적인 행동은 주위 사람들까지도 긍정적으로 만들며, 그들은 결국 나의 편이 된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아버진의 말씀을 행활 속에서 실천 것이며, 그것은 삶을 풍족하게 것이다.

  1. 매일 아침 세면 웃는 연습을 한다.
  2. 모든 일은 웃으면서 시작한다.
  3. 말하기 전에 번만 생각 하는 습관을 가진다.(3초만 늦게 이야기한다.)
  4. 대화 때는 먼저 남의 말을 충분히 들은 후에 생각을 이야기한다.


  • 지식

무엇을 하든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잃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나의 삶을 단계씩 도약시킬 것이다.

꾸준한 훈련을 통하여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습관이 몸에 익숙해 지도록 한다.

  1. 매일 아침 10, 저녁 10 Planner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일주일에 한번 feedback)
  2. 달에 2 이상 책을 읽고 책에 대한 comment 정리 글로 남긴다.
  3. 주제에 상관없이 달에 A4 이상의 글을 쓴다.
  4. 일주일에 2 이상 Blog 자료 update한다.
  5. 내가 하는 일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영어 구사 능력을 갖는다.
  6. 50 까지 2000 읽기, 50 5000 읽기
  7. 모든 것은 내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 폭넓은 지식 전문 지식 습득에 힘쓴다.

  • 경제적 자유

나의 사명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수입을 늘리는 아니라 현명한 소비생활로 미래를 준비한다.

  1. 아파트 구입(30, 2011)
  2. 가계부 쓰기
  3. 정원이 있는 전원주책 구입
  4. 노후를 대비해서 일정액 저축한다.( 10만원이상)

  • 가족

아내는 나의 모든 조건에서 동등하다.

아내는 남편의 wife, 자식의 어머니, 집안의 며느리이기 이전에 하나의 인격체이며, 나름대로의 삶과 꿈이 있다.


나는 나의 자식이 어떤 학교를 가거나 어떤 직업을 가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단지 건강하게 살아가고, 건강한 정신을, 타인을 배려 하나의 사람으로서 커가길 바랄 뿐이다.


부모님은 나를 헌신적으로 길러 주셨다, 이제는 내가 갚아야 때이다.

  1. 가사와 육아는 서로에게 특별한 사정이 없는 동일하게 분담한다.
  2. 하루 30 이상 아내와 대화한다.
  3. 하루 30 이상 TV 보지 않는다.
  4. 항상 책을 가까이 있게 하여 스스로 공부하는 환경을 만든다.
  5. 일주일에 한번씩 부모님께 전화 한다.
  6. 아내에게 주에 한번씩 Email 또는 편지 쓴다.

  • 건강

모든 사명들을 이루고 지켜갈 있는 기본은 건강이다.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건강할 있도록 절제된 생활을 한다.

균형있는 섭취와 적절한 운동으로 항상 최상의 condition 유지 되도록 노력한다.

  1. 담배는 최대한 줄이고 나중에는 끊는다.
  2. 몸무게 70~72kg 유지 하도록 노력 한다.
  3. 아내와 같이 있는 운동이라면 항상 같이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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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가 진다.
배가 고픈게 아니라 정신적인 허기가 진다.
자주 공허한 공간만 바라 보는 시간이 많아 진다.
왠지 모를 쓸쓸함, 외로움이 밀려든다.

가슴속에 답답함이 너무나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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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아버지가 서울 병원에 평소 간이 않좋으 셨는데.. 그 때문에 오신다는 소식을 어머니 한테 전해 들었다.

병원 예약 해야 되지 않냐 하니. 벌써 예약을 했다 하셨다. 그 순간 가슴이 찡해 오는 걸 ....

이 못난 자식이 걱정할까봐 아무 말씀 못하였다 하셨다..

시골 분들이 서울에 올라 오셔서 병원 예약을 하고 그냥 내려 가셨다는 것에 나는 그 마음을 알지만 화가 났다.

이 못난 자식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지금 전화 한통 드려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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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9월 6일에 친한 친구가 둘째 초롱이를 하늘라로 보내 전화를 했다..
전화 벨이 울리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수화기 저 넘에서 들려오는 어두운 소리에 더욱더 가슴이 메여 오는 것을 느꼈다..
제발 아니길 가슴 속에서 울부 짖었지만.. 친구의 소리는 한치의 틀림도 없이 반대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심정 자식 키우는 부모로서 그것도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식을 하늘나라로 보내는 심정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2/3는 더 많이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눈물과의 전쟁을 벌였다..
주위 시선에 상관없이 의지대로 되는것이 아니었다..

친구 얼굴이 보고싶어.. 옆에 있어주지 못해. 더 많이 미안하고..
전화를 할까 수 십번도 더 전화기를 열었다 닫았다..

이 자식  힘내라.. 딛고 일어서는걸 내가  힘을 실어 줕테니 혼자라는 생각 하지 말거라...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눈물이 난다..

근식아 힘내라....

왕관을 벗어라

집에 들어올때는 네가 밖에서 썼던 왕관을 벗어 놓고 들어오렴
집에서 너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아내이자 엄마라는 자리란다.
만약 가족에게 우유가 필요하다면 너는 언제든지 우유를 사와야해.
가장 강한 힘은 가족에서 나오는 거란다.

- 행복한 동행 6월호 중에서
===========================================================

2006년 여성최초로 펩시 CEO에 오른뒤 불과 1년만에 회장이 된
인도출신 여성 경영인 “인드라 누이”
그의 어머니가 CEO로 지명되던날 그에게 한 말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만큼 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에 돌아올때는 직장에서 있었던
권위, 불만, 짜증등의 모든것을 벗어놓고 오세요!!

아픔을 겪은 친구에게


"
나 역시 그런 길을 걸었다오, 친구.
나 역시 그대와 똑같은 아픔을 겪었어요.
하지만 일이 벌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모든 난관에는 교훈이 있어요.
과거를 후회하지 말아요.
오히려 과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당신의 스승으로 받아들이세요."


-
로빈 샤르마의《나를 발견한 하룻밤 인생수업》중에서 -


*
아픔을 겪은 사람만이 아픔을 압니다.
그러나 그 아픔에 묻히지는 말아야 합니다.
특히 과거로 지나간 아픔의 자리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간 아픔의 경험에서 뜻을 찾고 교훈을 발견하면
자신의 인생에 다시없는 보물이 됩니다.

삶은 후회의 연속인듯 여겨 진다.
숱한 다짐속에 하루를 시작하고 다시 숱한 후회속에 하루를 정리한다.
이렇게 후회의 날들을 줄일수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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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상 - 헬렌켈러 비하인드 스토리

교과서도, ‘세계위인전기’도 철저히 외면했다. 그녀의 신체적 장애만 부각시켰을 뿐 정작 장애를 극복한 그녀가 지키고 설파하고자 했던 이념은 깨끗이 지워버렸다. 미국에서조차 시각, 청각 장애를 이겨낸 여인으로만 알려져 있는 헬렌 켈러(1880∼1968). 그녀의 삶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1998년 전기 작가 도로시 허먼의 <헬렌 켈러-A Life>(미다스북스, 2001)가 출간되면서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정열적인 사회주의자로서 헬렌 켈러가 되살아난 것이다.


위인전 속의 헬렌 켈러와 세상 속의 그녀

조금은 낯설은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를 만나기 전에 먼저 기억을 되살려 어렸을 때 읽었던 '세계위인전기' 속의 그녀부터 만나보자. 1880년 미국 알라바마주 투스쿰비아에서 태어난 헬렌은 원래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건강한 아이였다. 잘 자라던 헬렌은 19개월 되던 1882년 2월 심한 열병을 앓게 된다. 당시 주치의가 며칠 안에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진단할 정도였다. 열병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이때의 열병으로 헬렌은 시력과 청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된 헬렌은 촉각과 후각 등으로 세상을 느끼고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헬렌은 5살이 돼서야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족들이 자기처럼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말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가족들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을 따라할 수도 없었던 헬렌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물건을 집어던지고 발버둥을 치는 등 점차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다

그렇게 7살이 됐을 때 헬렌은, 그 후 50여년 동안 선생님이자, 친구로 지낸 가정교사 앤 설리번을 만나게 된다. 아일랜드 고아출신으로 빈민보호시설에서 자라난 설리번도 5살 때 앓은 결막염으로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이었다. 설리번이 알파벳을 헬렌의 손바닥에 써주면서 헬렌은 글을 터득하게 됐다.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인 보스톤의 퍼킨스 학교와 뉴욕의 라이트-휴머슨 학교에 졸업한 헬렌은 16세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헬렌이 1904년 졸업할 무렵 그녀는 독일어를 비롯해 5개의 언어를 구사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한 시각, 청각 장애인이었다. 이후 1968년 숨을 거두기까지 헬렌은 미국시각장애인협회 일을 하며 국제적인 장애인 복지사업을 펼쳤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헬렌 켈러의 위대한 생애이다. 장애를 극복한 삶은 그 자체만으로 위대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가려져 왔던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자로서의 삶’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녀를 온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

헬 렌이 사회운동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헬렌은 여성의 권리, 특히 참정권 쟁취를 위한 운동을 펼쳤다. 당시는 미국, 영국 등 민주주의의 선진국에서조차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았을 때였다. 영국은 1919년, 미국은 1920년에 이르러서야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헬렌은 1909년 사회당에 가입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12년 사회주의 신문 <뉴욕 콜>에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몇달 동안 내 이름과 사회주의가 신문에 같이 올라왔다. 한 친구는 내가 야구, 루스벨트 대통령, 뉴욕 경찰 스캔들 기사와 함께 1면을 장식했다고 말해줬다.…악평도 이익이 될 수 있다. 내 활동을 기록하는 신문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기사에 자주 쓴다면 난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 글에서 헬렌은 설리번의 추천으로 웰스(H. G. Wells)의 <신세계(New World for Old)>를 읽으면서 사회주의자가 됐다고 고백했다.
설리번은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헬렌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쳐 준 장본인이었다. 설리번과 1905년에 결혼한 사회주의자 존 메이시 역시 헬렌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헬렌은 이후 독일에서 발행되는 점자로 된 사회주의 격월간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읽으며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나를 이용한 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자본주의 언론

당 시 헬렌은 이미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녀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주류언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신문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볼셰비키'가 헬렌의 명성을 이용하려고 하며, 헬렌은 보지도, 듣지도 못해서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기사를 썼다. 이를테면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25년 동안 켈러양의 선생님이자 영원한 동반자는 메이시 부인(설리번)이었다. 메이시 부부는 둘 다 마르크스주의의 열광적인 선전가이며, 이 평생지기에게 의존하고 있는 켈러양이 그런 생각에 동화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헬렌은 “존 메이시는 열광적인 마르크스주의 선전가일 수 있지만 메이시 부인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라며 “편집자는 사회주의자 또는 다른 지적인 인물이 되기에는 사실에 대한 감각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고 비꼬았다. 헬렌은 또 사회주의자들이 주목을 끌기 위해 “불쌍한 헬렌 켈러를 이용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와 같은 위선적인 동정은 거절한다”면서 “(자신을) 이용한 것은 자본주의 언론”이라고 반박했다.



돈에 순종하는 편집자들은 사회주의 비방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

그 녀는 자본주의 신문의 이같은 보도에 대해 “신문 뒤의 금권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며 자신을 먹여 살릴 돈에 순종하는 편집자들은 사회주의를 비방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훼손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헬렌이 사회주의자로 활동할 당시는 미국사회에서 사회주의가 어느 때보다 힘을 발휘하고 있던 때였다. 1912년 대통령선거에서 사회당의 유진 V. 뎁스 후보는 1백만 표 가까이 득표했고 1천명이 넘는 사회주의자들이 공무원으로 일했다. 또한 노동운동에서도 새로운 힘이 넘쳐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전 투적 노동조합인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은 1905년 설립돼 숙련공 중심의 미국노동총연맹(AFL)과는 달리 미숙련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교육시켰다. 유진 뎁스의 선거운동을 도왔던 헬렌은 “사회당이 점점 정치적 늪에 빠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탈당하고 IWW에 가입했다. <뉴욕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헬렌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IWW에 가입한 것은 사회당이 너무 더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회당은 정치적 늪에 빠져들고 있다. 사회당이 정치체제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거나 한 자리를 얻으려 애쓰는 한 변혁적 성격을 유지한다는 것은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거의 불가능하다.” “진정한 임무는 경제적 기반 위에서 모든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단결시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정치적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왜 생디칼리스트 조직인 IWW에 가입한 이유를 알게 해준다.



FBI 보고서 “그녀는 공산주의, 파시스트, 나찌다”

물 론 사회주의는 여전히 그녀의 나침반이었다. 참정권 시위에 참여했던 헬렌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전투적 참정권론자입니다. 나는 참정권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나에게 사회주의는 이상을 실현하는 운동입니다"라고 말했다. 헬렌은 이후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저널리스트 존 리드를 비롯한 당시 미국의 급진적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다. 그녀는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맞서 윌슨 대통령에 항의하고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소비에트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됐다.
헬렌의 이후 활동은 사형제도, 아동노동,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1940년대 헬렌은 스페인 공화주의자 석방운동,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사회주의자 석방운동에 동참했다. 1924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48년 동안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 색출에 앞장섰던 존 에드거 후버에게 헬렌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연방수사국은 헬렌이 존경받는 장애인 활동가라는 점에서 전면적인 수사를 벌이지는 못했지만 사찰을 진행해 43쪽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이 보고서에서 헬렌은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공산주의, 파시스트, 나찌 정당 당원"으로 분류돼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헬렌은 1943년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유명인사들과 함께 의회반미활동위원회를 해체하라는 탄원서에 서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장애를 극복한 여인으로만 알려졌던 헬렌 켈러. 여성운동가로서, 평화주의자로서 그리고 사회주의자로서 정열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가 극복하고 했던 것은 자기의 신체장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각장애를 가진 경제와 청각장애를 가진 사회” 바로 '자본주의'였다.



                                              출처: 레디앙(www.redian.org)
2차 출처 : pgr21(www.pgr21.com)


나 역시 헬렌켈러 하면 장애를 딛고 일어선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렇게 철저히 정보를 막아버린 미국또한 무언가를 감추려 하는듯한 생각이 든다.

장애 극복이 너무나 위대한것이지만 이것보다 헬렌켈러가 활동한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회를 변화 시킨 아니 변화 시키진 못했어도 영향을준 헬렌켈러가 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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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든다.
삶에 무엇 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가장 중요할것인데.. 요즘은 무엇하며 살아야 하나하는
걱정만 앞서게 된다..

억지로 애쓴다고 해서 될일도 아닌데 조바심이 나는 건 나도 어쩔수 없는 사람인가?
어쩔수 없는 눈앞의 이익에 전전긍긍하면 살아 갈수 밖에 없는것이 때론 술 한잔 기울이며 떨쳐 버리고 싶은 생각이 요즘엔 무척이나 많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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